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베니토 무솔리니/평가 (문단 편집) === 정치 === [[아돌프 히틀러]]와 [[도조 히데키]]와 함께 [[추축국]]을 상징하는 인물로 평가된다. [[제2차 세계 대전]]에 발을 들이기 전까지만 해도 서방국가에서도 평가가 그렇게 나쁘지는 않았다는 의외의 사실도 있으나, 히틀러도 전쟁을 일으키기 전에는 일각에서 좋은 평가를 받았었다는 걸 보면 크게 의미를 둘 평은 아니다. 실제 2차대전이 개전되기 직전인 1937년, 미국의 학생들을 대상으로 조사한 가장 존경하는 현대인물 2위에 랭크되었다. 1위는 [[프랭클린 D. 루스벨트]], 3위는 '''[[아돌프 히틀러]]'''였다. [[윈스턴 처칠]]은 한때 베니토 무솔리니의 집권에 대해 '[[국개론|이탈리아인들이 자기들에 맞지도 않는 민주주의 놀이를 하느라 나라 망쳤]]었는데, 무솔리니가 이탈리아인들에게 어울리는 체제로 개선을 해줬다.'고 돌려까기도 했다. 물론 이건 지도자였던 무솔리니와 그를 지지하는 이탈리아 국민을 쌍으로 비꼬는 것이고, 처칠과 아타튀르크 등은 원래부터 히틀러와 무솔리니의 실체를 파악해 전간기부터 부정적인 언급을 몇차례 하였다. 또 히틀러와 나치 독일이라는 [[전쟁범죄]]에서 한 술 더 뜨는 것이 있어서 무솔리니와 [[파시스트 이탈리아]]가 묻힌 감도 있다. 그리고 무솔리니는 파시즘의 창시자로 평가받으면서도 막상 국내 정치에서 동시대 다른 파시스트 후발 주자들에 비해선 비교도 안 되게 온건했다. 히틀러야 말할 것도 없고, 헝가리의 [[살러시 페렌츠]], 루마니아의 [[이온 안토네스쿠]] 등은 피비린내나는 학살과 함께 [[홀로코스트]]에 동참했다. 무솔리니의 지원을 통해 정권을 잡은 [[프란시스코 프랑코|프랑코]]도 수십만 단위의 대규모 자국민 학살을 저지르며 살벌한 국내 탄압을 저질렀다. 반면 무솔리니는 막상 집권 과정과 집권 이후에도 마테오티 살인 사건과 같은 간판 정치인, 핵심 정적들을 살해하고 정치깡패를 동원해 수시로 탄압한 걸 빼곤 자국민 상대로 대규모 폭력적 테러를 저지르지 않았다. 무솔리니는 심지어 이데올로기, 대중 기반 차원에선 본인도 인정한 가장 위험한 숙적인 [[안토니오 그람시]]도 감옥에 넣기만 했지 죽이지는 않았다. 내전 당시 진공하면서, 그리고 승전 후 샅샅히 공산당원, 사회당원, 아나키스트들을 잡아 족쳤던 프랑코와는 대조적으로 반대 정파를 지지했던 사람들도 대놓고 반체제 정치 활동을 계속하지 않으면 대충 그대로 두는게 일반적이었다. 이탈리아 내에서 자국민 대상 대규모 폭력적 통치가 시작된 건 제2차 세계 대전이 터져 자국이 본격적으로 전장이 되고, 그리고 무엇보다 43년 강화 이후 나치스가 진주해오며 전국이 파시스트 vs 반파시스트 세력으로 똑 쪼개진 [[이탈리아 내전]] 시점에서였다. 결국 국내 통치란 측면에선 다른 동업자, 이웃 동맹들에 비해 덜 폭력적이고, 파시즘이 사회 일상에 깊게 침투하며 문화, 예술, 지식인 사회를 틀어막았던 나치 독일, [[프랑코 정권|프랑코 치하 스페인]]과 달리 이탈리아에선 정권 쟁취 시기나 월드컵 같은 이벤트 몇몇 빼곤 '비정치적 일상'이 상당히 유지되어서 무솔리니의 자국 내 기억은 크게 금기시 되지 않는 편이다. 파시스트당의 법적 후계인 [[이탈리아의 형제들|FdI]]는 현재 이탈리아에사 중견급 원내정당에, [[조르자 멜로니|총리]]까지 배출하는 정당이다. 정치적 혈통으로 왕따당하거나 하는 것도 아니어서 [[중도우파 연합|우파 선거 연합]]에 공공연히 참가한다. 독일의 극우 정당 [[독일을 위한 대안]]이 나치당의 직접적 후신이 아님에도 독일을 포함한 EU 내에서 정치적 왕따라는 걸 생각해보면 이탈리아 내에서의 인식이 그렇게 나쁘지 않단 걸 알 수 있다. 그러나 외부적으로 눈을 돌리면 무솔리니는 여전히 리비아, 에티오피아에서의 대규모 인종청소와 각종 범죄의 최종 책임자이며, 유고슬라비아 침공, 그리스 침공의 주모자였다. 히틀러나 도조의 경우 자국 내에서도 일부 극우들을 제외하면 평판이 매우 안 좋은 것과는 달리 이탈리아 사람들 중에는 아직도 베니토 무솔리니를 좋게 평가하는 사람들이 있다. "나치" 자체가 금기어가 되었고 오른손을 곧게 치켜드는 [[로마식 경례]]를 행할 경우 처벌대상이 될 수도 있는 독일에 비해 이탈리아에서는 현재도 양지에서 버젓히 활동하는 파시스트 정당이 여럿 존재하고 이들 당 행사에서는 파시스트식으로 공공연히 경례한다. 전후에 나치 전범들의 자식들이 대체로 성을 바꾸거나 남아메리카로 이민해 은둔 생활했던 반면, 무솔리니의 자식들은 아버지 사후에도 그다지 곤란을 겪지 않아서 장남은 예술 평론가로서 명성을 날렸고 막내 아들 로마노는 [[재즈]]를 연주하는 사람으로 활동하면서 [[쳇 베이커]] 같은 유명한 아티스트들과 협연하고 1995년에 내한 공연도 했다. 내한 당시 아버지를 어떻게 기억하느냐는 한국 기자들에 질문에 "멋있었던 분"이라고 대답하기도 했다.[[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aver?articleId=1995072000289118015&editNo=5&printCount=1&publishDate=1995-07-20&officeId=00028&pageNo=18&printNo=2289&publishType=00010|#]] 현재도 소위 [[이탈리아군의 졸전 기록]] 같이 유머소재로서 가볍게 사용되기도 한다. [[움베르토 에코]]는 이탈리아 파시즘 체제가 히틀러의 파시즘 체제보다 온건했던 것은 그 사람들의 선의 때문이 아니라 그 사람들이 '''더 멍청했기 때문에''' 예술과 같은 고급 문화 영역에 체계 있게 손을 댈 수 있는 능력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평가한다. 실제로 일부 점령지역에선 독일 못지 않은 학살과 탄압을 저지르기도 했다. 여담으로 무솔리니 통치기 마피아 세력이 급격히 약화되었다가 연합군이 이탈리아로 진주하면서 마피아가 다시 부활 하였다. 당시 마피아는 단순 범죄조직이 아닌 군소군벌급 세력을 갖고 있었고 중앙집권국가를 원하던 무솔리니가 이를 탄압하자 마피아들은 연합군에게 협조하여 상륙지점이나 군기지 위치등을 알려주는 정보원 역할로 무솔리니의 파시즘 정권에 저항했다. 당연하지만 마피아로 인해 피해를 본 사람들은 무솔리니에게 호의적인 평가를 내린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